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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빠에야를 처음 먹은 곳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였습니다.
기대가 컸는데 당시 갔던 곳이 뷔페에 가까운 식당이어서인지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 TV나 온라인에서 먹음직스러운 빠에야를 볼 때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빠에야를 찾아보면서 의외였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새우와 홍합이 가득한 해산물 빠에야가 원래 형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빠에야는 스페인식 해물볶음밥과 다르다
빠에야를 처음 접하면 우리나라의 볶음밥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조리 원리는 꽤 다릅니다. 이미 지어놓은 밥을 재료와 볶는 방식이 아니라
팬에서 쌀과 육수, 여러 재료를 함께 익혀 쌀이 맛을 흡수하게 만드는 쌀 요리에 가깝습니다.
빠에야라는 이름 자체도 음식에 들어가는 특정 재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발렌시아어에서 paella는 조리에 사용하는 팬을 뜻하며, 이 넓고 얕은 조리도구의 이름이 음식 이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빠에야는 무엇을 넣느냐만큼 어떤 팬에서 어떤 방식으로 쌀을 익히느냐가 중요한 음식입니다.
빠에야의 고향은 발렌시아 알부페라
빠에야는 스페인 전역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시작된 음식이 아닙니다.
스페인 문화부 자료에서는 빠에야의 기원을 발렌시아의 알부페라(Albufera) 지역에서 찾습니다.
쌀을 재배하기 좋은 환경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곳의 농부들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쌀과 함께 조리한 것이 빠에야의 뿌리가 됐다는 설명입니다.
18세기에는 빠에야 또는 arroz a la valenciana와 관련된 조리법이 문헌에 등장하며,
19세기에 들어서는 발렌시아 사회에서 가족과 사람들이 모여 함께 먹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따라서 빠에야를 이해할 때는 단순히 '스페인의 유명한 쌀 요리'라고 기억하기보다
발렌시아의 쌀 재배 환경과 식문화에서 출발한 음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원조 빠에야에 새우와 홍합이 없다고?
제가 가장 의외라고 느낀 부분인데요.
한국에서 빠에야라고 하면 큼직한 새우, 홍합, 오징어가 올라간 모습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빠에야 발렌시아나(Paella Valenciana)의 대표 재료는 다릅니다.
발렌시아 공식 관광 자료에서 소개하는 주요 재료를 보면
쌀, 닭고기, 토끼고기, 그린빈과 가로폰(garrofó) 같은 콩류, 토마토, 올리브오일, 사프란 등이 중심입니다.
지역과 계절에 따라 달팽이, 아티초크 등 다른 재료가 들어가는 변형도 있습니다.
즉,
빠에야 = 해산물 요리
라고 생각했다면 절반만 맞는 셈입니다.
해산물 빠에야 역시 실제로 존재하고 널리 사랑받는 종류이지만,
그것을 빠에야의 원형으로 보는 것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렌시아식·해산물·혼합 빠에야, 무엇이 다를까?
처음 빠에야를 주문한다면 이름보다 주재료를 먼저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간단합니다.
전통적인 발렌시아식은 닭고기와 토끼고기, 콩과 채소가 중심이라 육류와 채소의 풍미를 맛보고 싶은 사람에게 맞습니다.
해산물 빠에야는 새우나 홍합, 오징어 등 해산물을 사용하는 형태로
우리가 국내 스페인 음식점에서 쉽게 떠올리는 모습과 가깝습니다.
육류와 해산물을 함께 사용하는 혼합 형태도 있습니다.
검은색 쌀 요리인 아로스 네그로(arroz negro)도 빠에야와 함께 자주 언급되지만,
스페인에서 모든 팬 조리 쌀 요리를 빠에야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쌀 요리를 하나로 묶어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빠에야에서 소카라트가 중요한 이유
잘 만든 빠에야에서 놓치기 아까운 부분이 팬 바닥입니다.
쌀을 익히면서 팬 바닥에 얇게 눌어붙은 부분을 소카라트(socarrat)라고 합니다.
한국 음식에 비유한다면 누룽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완전히 같은 음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빠에야를 먹으러 갔다면 윗부분의 쌀만 덜어 먹기보다 팬 바닥의 상태도 한번 확인해볼 만합니다.
다만 소카라트와 단순히 탄 밥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닥을 새까맣게 태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쌀이 눌어붙으면서 생기는 구수한 풍미와 식감을 즐기는 것이 핵심입니다.
집에서 만들 때는 '젓지 않는 것'부터 기억하자
집에서 빠에야에 도전한다면 전문점과 똑같이 재현하려고 하기보다 조리 원리를 먼저 이해하는 편이 쉽습니다.
우선 넓고 얕은 팬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쌀이 너무 두껍게 쌓이지 않아 육수의 증발과 쌀의 익는 정도를 조절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육수를 넣은 뒤에는 리소토를 만들 때처럼 계속 휘젓지 않는 것도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프란이 없다면 강황으로 노란색을 낼 수는 있지만 맛과 향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빠에야를 만든다면 이 둘을 동일한 향신료의 대체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정확한 쌀과 육수 비율이나 조리시간은 사용하는 쌀의 품종, 팬 크기와 화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검증하지 않은 하나의 비율을 '황금비율'로 외우기보다 사용하는 쌀 제품의 조리 특성과 팬 상태를 함께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스페인에서 다시 빠에야를 먹는다면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먹었던 빠에야가 기대에 못 미쳤던 경험 때문에 한동안 저에게 빠에야는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맛은 잘 모르겠는 음식'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빠에야의 기원과 종류를 찾아보고 나니 다음에는 무엇을 확인해야 할지가 오히려 분명해졌습니다.
메뉴판에서 단순히 Paella라는 글자만 찾기보다 Paella Valenciana인지, 해산물 빠에야인지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닥의 소카라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새우와 홍합이 가득 올라간 모습만 빠에야라고 생각했다면,
전통적인 발렌시아식 빠에야는 상당히 다른 음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를 알고 주문하면 처음 빠에야를 접할 때보다 메뉴판을 보는 재미도 훨씬 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