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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탁에서 빼놓기 어려운 식재료 중 하나가 고추입니다.
찌개에 송송 썰어 넣기도 하고 양념장이나 볶음요리의 매운맛을 더할 때도 자주 사용하는데요.
그런데 고추를 반으로 잘라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쪽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씨입니다.
그래서 흔히 ‘고추씨가 가장 맵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추의 매운맛을 만드는 성분이 주로 만들어지는 곳은 씨 자체가 아닙니다.
고추씨보다 먼저 봐야 할 하얀 부분
고추를 세로로 갈라보면 씨가 붙어 있는 하얀 조직이 보입니다.
흔히 하얀 심지나 속대라고 부르는 이 부분을 식물학적으로는 태좌(placenta)라고 합니다.
고추의 매운맛을 만드는 대표적인 성분은 캡사이신을 비롯한 캡사이시노이드(capsaicinoids)입니다.
이 성분들은 고추 열매 전체에 똑같이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씨 주변의 태좌 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오와주립대학교 자료에서도 캡사이시노이드는 씨와 열매를 연결하는 태좌의 분비 조직에서 생성되며,
씨 자체가 캡사이신의 생성원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고추를 손질하면서 매운맛을 줄이고 싶다면 씨만 털어내는 것보다
씨가 붙어 있던 안쪽의 흰 태좌까지 함께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고추씨도 맵게 느껴질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고추씨를 씹어보면 맵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씨에 캡사이신이 거의 없다면 왜 그런 걸까요?
이유는 씨의 위치를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고추씨는 캡사이시노이드가 만들어지는 태좌 바로 옆에 붙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변 조직의 매운 성분이 씨 표면에 묻거나 흡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추를 먹을 때는 씨에서도 매운맛을 느낄 수 있지만,
‘씨가 캡사이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장 맵다’고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고추를 볼 때도 예전에는 씨가 많이 붙어 있으면 왠지 더 매울 것부터 같았습니다.
워낙 씨가 눈에 잘 띄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운맛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손질할 때 눈여겨봐야 할 곳은 씨 뒤에 숨어 있는 하얀 조직입니다.
고추는 왜 씨 주변에 매운 성분을 만들까?
더 재미있는 것은 캡사이신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고추 입장에서는 열매를 무조건 아무 동물에게나 먹히는 것이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열매를 먹으면서 씨까지 씹어 파괴하는 동물이라면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생 고추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캡사이신이 씨앗을 파괴할 수 있는 일부 포유류의 섭취를 억제하는 반면,
새는 캡사이신의 자극에 상대적으로 둔감해 고추 열매를 먹고 씨를 퍼뜨릴 수 있다는 결과가 보고됐습니다.
그래서 캡사이신을 단순히 ‘아무도 먹지 못하게 만드는 독한 물질’로 보기보다는
고추의 씨앗을 보호하면서 씨를 퍼뜨리는 동물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는 성분으로 이해하면 더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고추를 먹으며 느끼는 강렬한 매운맛이 식물의 생존과 번식 전략과도 연결되어 있는 셈입니다.
매운맛을 줄이고 싶다면 씨만 빼지 마세요
이 원리를 알면 실제 요리에도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풋고추나 청양고추를 음식에 넣고 싶은데 매운맛은 조금 줄이고 싶다면 고추를 세로로 가른 다음,
씨를 털어내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씨가 붙어 있던 하얀 태좌와 안쪽 막을 함께 걷어내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운맛을 충분히 살리고 싶다면 이 부분을 굳이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같은 종류의 고추라고 해서 매운 정도가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품종뿐 아니라 재배 조건과 성숙 정도 등에 따라서도 매운맛에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하얀 부분을 제거했다고 해서 모든 고추가 동일한 정도로 순해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매운 고추를 많이 손질할 때는 손도 조심해야 합니다.
캡사이신은 입에서만 자극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피부나 특히 눈과 같은 민감한 부위에 닿았을 때도 강한 자극을 줄 수 있습니다.
매운 고추를 대량으로 손질한다면 장갑을 사용하고, 손질 중에는 눈이나 얼굴을 만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고추와 양파의 ‘매운맛’은 같은 걸까?
여기까지 알고 나니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추뿐 아니라 생양파도 먹으면 맵고 알싸하다고 표현하지만 두 식재료에서 느끼는 자극의 원리는 같지 않습니다.
특히 양파는 가열하면서 자극적인 맛이 줄고 단맛과 구운 향이 두드러지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 차이가 궁금하다면 양파를 오래 볶으면 왜 달아질까? 캐러멜라이징 쉽게 이해하기에서
가열하면서 양파의 맛이 달라지는 원리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고추를 잘랐을 때 우수수 떨어지는 씨 때문에 씨가 가장 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매운맛의 핵심은 그 뒤에 붙어 있는 하얀 태좌 조직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고추를 손질할 때는 씨만 보지 말고 그 씨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한번 살펴보세요.
매운맛을 줄여야 할 때 어느 부분을 제거해야 하는지도 훨씬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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